
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앙금이 남아 있거나, 다 말하지 못한 진실이 있을 때, 혹은 제대로 이해받기 위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때 난 대화로서 그것을 풀어가기 전에 꽤 오랫동안, 숨어버린다. 그렇게 해서 때론 오해도 받고 그러다 뒤늦게 정신차리고 다시 실타래를 잘 풀어가기 위해 헐레벌떡할 때도 있지만, 가끔은 그것들이 다 소용없는 경우도 생긴다. 대답없는 벽에 대고 무작정 기다려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.
내게 이 선물을 준 친구는 내가 온라인을 기반으로 해서 만난 최초의 사람이자, 그 가운데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. 우린 꽤나 오랫동안 서로에게 소원한 사이였지만, 최근에 이 친구와 다시 연락이 닿게 되면서, 그리고 우연 반 필연 반쯤으로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 진짜 '나'를 드러내게 되면서 스스로도 겁날 만큼 너무 확, 가까워지고 말았다는 느낌이 들었다. 말로는 괜찮다, 다 잘 될거다, 라는 식으로 무마했지만 사실 당혹스럽고 두렵고 미안하고 이런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. 처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내 정체성을 드러냈던 2006년 봄, 그때도 같은 감정으로 방황하긴 했었다. 하지만 생판 남이지만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과, 이미 지난 12년간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, 허나 다른 성질의 사람에게 그러는 것과는 너무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.
그래서 또 숨었다. 한참 동안을 제대로 연락도 받지 않고, 답을 원하고 있음이 분명한 메시지에도 답하지 않고, 조용조용히 숨어 그저 관찰하면서. 그런데 오늘 느꼈다. 숨는다고 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. 어차피 앞으로 몇 차례나 더 같은 일을 겪어야 할 것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니까. 그래서 좀 늦은 감은 있지만 나오기로 했고, 원래는 직장일을 완전히 마쳤을 때 하려던 일을 지금 실행에 옮긴다. 저런 선물을 받고도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그 친구보다는, 그 친구와 내가 공유했던 '역사'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기에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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